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소설문학선집’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청춘≫과 ≪학지광≫에 발표된 현상윤의 작품은 <한의 일생>, <박명>, <재봉춘>, <청류벽>, <광야>, <핍박> 등 모두 여섯 편이다. 그중 <핍박>은 1917년 발표되었지만 실제 창작 연대는 1913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핍박>을 제외한 다섯 편의 소설들은 인물의 일대기를 서술자의 시점으로 관찰하고 평가하는 서술 방식을 취함으로써 신소설과 공통된 부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전의 신소설들이 주창했던 신교육을 통한 개화사상의 전파나 풍속 개량 문제는 현상윤의 소설에서 강한 주제로 피력되지 않는다. 신소설들이 사실 전달자이자 기록자로서의 전지적 작가 시점을 강하게 내세웠다면 현상윤의 소설에서 보이는 서술자의 모습은 허구적 창작자로서의 의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현상윤의 단편소설에서 보이는 비극적인 전락 구조라든지 인물의 패배적 결말은 이런 측면에서 허구적 서사의 강화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현상윤의 소설 중 가장 먼저 발표된 <한의 일생>은 양반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나 가세가 몰락해 고아가 된 김춘원의 불행한 삶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의 참담한 현실 인식과 살인 행위는 윤리와 신의가 내팽개쳐진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드러내는 동시에 비극적 세계에 대한 주인공의 대응 방식을 나타낸다. 기존의 신소설에 볼 수 없었던 비극적 결말이라든지 주인공이 끝까지 지키고자 하는 윤리적 내면 의식은 근대소설이 강조한 개인의 선택과 의지를 제한적으로나마 드러낸다.
봉건적 가족구조의 폐단으로 인해 비극을 맞는 젊은 부부의 이야기를 그린 <박명>은 해외 유학이라는 소재를 다룬다는 점에서 당대 소설들과 소재를 공유한다. 특징적인 것은 이 소설의 말미에 첨가된 서술자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보시는 여러분은 몬저 이것이 과연 사실이냐 안이냐 하는 말부터 나오리다”로 시작되는 서술자의 말은 이 소설이 근대적 단편소설로 가는 이행기의 소설임을 환기시킨다. 이는 허구적 창작자로서의 작가라는 인식이 아직 선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소설이 현실, 즉 사실의 기록이며, 작가는 이를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종래의 인식을 부분적으로 반영한다.
역시 일본 유학생 출신 주인공을 내세운 <재봉춘>은 유학을 중지하고 돌아와 계몽운동가로 활약하다가 신교육을 받은 여성과 연애하는 이재춘의 삶을 소재로 하고 있다. 유배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이재춘과 재회한 김숙경은 사랑을 성취하게 되는데 이러한 해피엔딩은 현상윤 소설에서 보기 드문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특히 이 작품에서 여성의 정절과 전개, 일편단심과 신의를 중요한 덕목으로 꼽고 있는데 이는 봉건적 가치관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봉건적 악습의 폐해를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유교적 원리에서의 효와 신의, 정절을 중요한 가치로 설정하는 현상윤 소설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신여성이나 유학파 지식인의 삶 그 자체보다는 숭고한 절개와 영원한 사랑의 덕목이 더 중요한 주제로 다뤄지고 있다.
신의를 숭상하는 지조 있는 인간에 대한 형상화는 <광야>에서 효의 가치를 구현하는 자식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들이 아버지를 찾는 고된 여정을 기록한 이 소설은 아버지의 축첩 행위와 돈만 밝히는 당숙 때문에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내 효심을 잃지 않는 의로운 인간 형상을 그리고 있다. 결국 온갖 고생 끝에 아버지를 찾는 감동적 결말을 보여주는 이 소설은 <재봉춘>처럼 의로운 인간이 승리하는 낙관적 면모를 드러낸다.
현실의 고난에 좌초하는 여성의 자살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보여주는 <청류벽>은 가부장제 사회가 가하는 억압의 문제를 사실적으로 파헤쳐 보인다. 이 소설은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여성의 억압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다른 작품보다도 선명한 사건 전개 양상을 보인다. 현상윤의 다른 소설들이 다룬 황금만능주의와 봉건적 구습의 문제를 선명하게 예시하면서 이에 절망하고 좌절해 전락해 가는 비극적 인물의 내면을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여성의 불행한 삶은 운명적인 것으로 예시되며 이에 좌절한 인물의 대응 방식은 죽음이라는 극단적 행위로 나타난다. 여기서 그려내는 것은 억압적 환경 속에서 비극적인 삶의 행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인간존재의 불행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소설들과 달리 <핍박>은 지식인의 불안한 내면을 가감 없이 토로한 일인칭 서술 방식으로 시선을 끄는 작품이다. <핍박>이 취한 내면적 서술 방식은 근대적 개인의 내면을 드러내는 단편소설의 출발로 호평받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수필적 특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미완적 실험작으로 비판받았다.
<핍박>에서 드러난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자기성찰적 고백의 양상은 이전의 신소설들이 보여준 계몽주의적 성격을 완전히 벗어나 근대적 개인의 출현을 알리는 전환기적 면모를 충분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소설이 사실을 기록하는 도구에서 벗어나 허구를 창작하는 개인의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예술품임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소설은 농민들과의 만남을 통해 흔들리는 자의식을 섬세하게 보여주면서도 그것을 실제적인 고민으로 집중시키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 한계를 함께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핍박>이 보여준 근대소설적인 면모는 다양하고 풍성한 현실 비판적인 문학의 흐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200자평
현상윤은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이 겪은 내면적 혼란과 궁핍의 현실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그의 소설에서 서술자는 허구적 창작자로서의 의지를 보여 줌으로써 비극적인 전락 구조나 인물의 패배적 결말에 대해 허구적 서사를 강화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게 했다. 특히 유일하게 일인칭 시점으로 서술된 <핍박>은 당시 소설로서는 획기적인 내면 서술 방식과 지식인의 비판적 현실 인식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현상윤의 8편의 작품을 통해 근대 단편소설의 실험과 그 성과를 볼 수 있다.
지은이
기당(幾堂) 현상윤은 1893년 평안북도 정주군 남면에서 출생했다. 기당의 부친은 한학자로서 성균관 전적과 승정원 주서를 지냈다고 한다. 기당의 별호인 소성(小星)은 대학생 때 지은 것으로 어린 시절 학문을 통해 접한 진암 현상준과 의암 유인석의 호국정신이 담겨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12세 때 조혼한 기당은 16세 때 평양 대성학교를 거쳐 1912년 보성중학교를 다니고 1914년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유학 생활을 한다.
현상윤은 유학생활 중에 잡지 ≪학지광≫을 편집하고 스스로 필자로 활약했으며 육당 최남선이 경영한 ≪청춘≫에도 수많은 소설과 수필, 시, 논설을 발표했다.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해 중앙 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현상윤은 곧이어 최린과 더불어 3·1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동경 유학생들이 독립운동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들은 현상윤은 국내에서 대규모의 시위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절감하고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합을 추진해 전국적 규모의 세력 조직에 앞장서게 된다. 독립운동 후 20여 개월 옥고를 치른 현상윤은 중앙고등보통학교장에 부임하게 된다.
해방 후 경성대학교를 거쳐 보성전문학교장을 맡았던 현상윤은 1946년 고려대학교 교수 겸 초대 총장으로 취임한다. 현상윤의 학문적 업적은 1949년 출간된 ≪조선유학사≫와 1960년 복간된 ≪조선사상사≫에 나타나는데, 이 저서들은 현상윤이 뛰어난 국학자임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할 수 있다. 1960년 6·25가 일어나자 현상윤은 강제 납북되어 행방이 알려지지 않은 채 이후 타계했다는 소식만 전해진다.
근대 신문학의 선도자이자 뛰어난 국학자로 활동했던 현상윤은 1914년부터 1917년까지 4년 동안 ≪청춘≫과 ≪학지광≫을 통해 여섯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함으로써 근대 단편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였다. 그는 소설뿐만 아니라 수필과 시에 걸쳐 폭넓은 장르의 문학적 글쓰기를 시도함으로써 당대 문단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현상윤의 다양한 학문적 업적과 문학 활동은 2000년 간행된 ≪기당 현상윤 문집≫(경희대학교 출판국) 과 2008년 간행된 ≪기당 현상윤 전집≫ 전 5권(나남)으로 정리되었다.
엮은이
백지연(白智延)은 1970년 서울에서 출생해 경희대학교 국문학과 대학원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면서 문학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연구서로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창비, 2001) 공저로 ≪페미니즘 문학비평≫(김경수 편, 프레스21, 2000), ≪20세기 한국소설≫(최원식 외, 창비, 2005) 등이 있다. 현재는 경희대와 성공회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차례
한(恨)의 일생
박명(薄命)
재봉춘(再逢春)
청류벽(淸流壁)
광야(曠野)
핍박(逼迫)
비 오는 져녁
경성 소감(京城小感)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이즘은 病인가 보다. 그러나 무엇으로든지 病일 理由는 업다, 新鮮한 空氣가 맥힘 업시 들어오고 玲瓏한 光線이 가림 업시 빗치고 새는 울고 꼿은 웃고 샘은 맑고 山은 아름다운데― 조곰도 病일 까닭은 업다.
그러나 病은 病이로다. 나제는 먹는 밥이 달지 안이하고 밤에는 잠이 편치 못하며 얼골은 파래고 살은 깍기며 피는 旺盛치 못하고 힘줄은 伸縮이 自由롭지 못하고 반가운 親舊를 맛나도 우숨이 發치 아니하고 남에게 稱譽를 바다도 깃븜이 나오지 안이한다―
-<핍박> 중에서